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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모아

지도로 보는 1차대전의 흐름

by 낭만가을 2020. 4. 22.

독일의 통일

35 개의 군주국과 4개의 자유시로 나누어져 있던 독일은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간의 전쟁(보오전쟁, 1866년)에서 프로이센이 승리하면서 프로이센을 중심으로한 통일의 기초를 이룩하게 됩니다. 또한 독일의 통일을 방해하려던 프랑스와도 전쟁(보불전쟁, 1871)전쟁을 벌여 승리함으로서 결과적으로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한 25개의 연방국으로 이루어진 독일제국이 탄생하게 됩니다.
보불전쟁으로 인해 프랑스는 막대한 배상금과 함께 알자스-로렌 지방을 독일에 할양하게 되고 양국의 관계는 악화되었을 뿐 아니라 전쟁이 재발할 가능성을 내포하게 됩니다.

비스마르크 수상의 중립 외교

독일의 수상이었던 비스마르크는 당시 세계  5대 강대국이자 유럽의 최강국들이었던 영국, 프랑스, 오스트리아-헝가리, 러시아, 독일간의 힘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특히 러시아, 프랑스와의 평화 관계 정착을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게 되고 당시의 형상을 유지하게 위한 정책들을 진행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정책은 당시 창궐하던 제국주의 이념에 의해 독일 국내에서도 많은 반대에 부딪히게 됩니다. 
  
비스마르크의 실각과 긴장의 고조

평소 비스마르크의 평화정책에 대해 불만을 지니고 있던 빌헬름2세가 독일의 새로운 황제로 등극하게 되자 비스마르크는 실각하게 됩니다.
빌헬름2세는 러시아와의 비밀동맹 갱신을 포기하고 당시 열강 중에 최약체국 이었던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새로운 동맹을 맺습니다.
이 로 인해 유럽의 미묘한 평화상태가 균열을 맞게되고 프랑스와는 모로코에서 전면전 직전까지 가게되는데 영국의 프랑스지지로 인해 독일이 철수하게 되지만 독-프 관계는 매우 악화됩니다. 독일의 3B(베를린-비잔티움-바그다드)정책과 영국의 3C(케이프타운-카이로-캘커타)정책으로 인한 충돌로 영-독 관계 또한 크게 악화됩니다.

1차 세계대전의 발발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의 황태자가 세르비아 청년에 의해 암살당하자 다음달 28일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대해 선전을 포고하게 됩니다.
이는 세르비아의 동맹국이었던 러시아의 참전을 불러왔고 오스트리아의 동맹국이었던 독일도 러시아에 선전포고 후 전쟁에 참전하게 됩니다.
결국 러시아의 동맹국이었던 프랑스가 전쟁에 참전하고 프랑스에 우호적이었던 영국마져 독일에 선전포고 하면서 전쟁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됩니다.

독일의 전쟁 계획

독일은 러시아, 프랑스 두강대국과의 동시 전쟁에 대비하여 전쟁영웅이자 이전 국방장관이었던 슐리펜이 입안한 슐리펜 계획이라는 전쟁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는 최소한의 방어 병력으로 러시아군의 공세를 막고 대부분의 병력을  벨기에를 통해 프랑스에 투입하여 프랑스군을 포위 공략하여 파리를 점령해 프랑스에게 항복을 받아낸 후 러시아와의 전쟁을 수행한다는 내용을 지닌 계획이었습니다.

전쟁초반의 움직임

프랑스는 플랜17이라는 전쟁계획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보불전쟁에서의 실지인 알자스-로렌지방으로의 주공을 펼친다는 것을 주 내용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개전후 프랑스는 독일이 예상한 대로 알자스-로렌지역으로 주공을 펼치게 되고 독일은 슐리펜 계획에 따라 벨기에를 침공하게 됩니다.
한편 동부전선의 타넨베르크에서는 독일측도 예측하지 못한 대승을 러시아군 에게 거두게 됩니다.

1차 마른전투

전쟁초반 전세의 움직임은 독일이 예측한 대로 맞아 떨어지게 되는데 독일군은 벨기에를 통해 진격을 계속해 파리근방 26마일 지점까지 다다르게 됩니다.
하지만 프랑스군의 계획적인 철수로 인해 독일군은 너무 빠른 속도로 진격해 보급선이 따르지 못하고 주공인 1군과 2군사이가 벌어지게 됩니다.
결국 재정비중인 프랑스 병력이 머무르고 있던 마른강 유역에서 프랑스군이 대대적인 반격을 개시해 독일군은 앤강 유역까지 철수하게 되고 더 이상의 진격은 못하게 되는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이후 독일군은 참호를 파서 방어선을 구축하게 되고 프랑스군도 반대편에 참호를 구축함에 따라 전선은 고착됩니다.

갈리폴리전투

안작군(ANZAC:호주와 뉴질랜드군)을 주력으로 한 연합군은 콘스탄티노플 근처의 갈리폴리 반도에 상륙작전을 펼치게 됩니다.
이는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여 오스만 튀르크를 고립시켜 동맹국에서 이탈시킨 후 고착상태에 있던 서부전선의 전세를 타개하기 위한 작전이었습니다.
영국의 해군 장관이었던 처칠이 입안한 이 작전은 터키군의 맹렬한 공세로 인해 실패하게 되고 엄청난 사상자만을 남긴 체 연합군은 갈리폴리에서 철수 하게 됩니다.

전선의 고착

그 후로 2년동안 서부전선과 동부전선은 거의 변화 없이 지루한 참호전을 전개하게 됩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작은 규모의 전투들이 벌어지기는 했지만 거의 공격하는 측에서 더 많은 피해를 입고 실패하게 됩니다.
한편 이탈리아는 1915년 옛 영토의 회복을 약속받고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대해 선전을 포고한 후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전쟁에 참가하게 됩니다.

베르덩 전투

1916년 독일의 참모총장 이었던 팔켄하임은 고착상태에 빠진 당시 전국을 타개하기 위해 대규모 공세를 계획하게 됩니다.
그 목표는 로마시대로부터 한번도 점령된 적이 없는 프랑스 항전의 상징이자 강력한 지하요새로 구성되어 있던 베르덩 이었습니다.
2 월 21일 독일 측의 공격으로 시작된 이전투를 통해 양측은 100만에 이르는 사상자가 발생할 정도로 격렬하게 전투를 벌이게 됩니다. 하지만 페탱의 지휘 하에 프랑스군은 결사적으로 항전하여 독일군을 몰아내고 전선은 다시 원상태로 돌아가게 됩니다.

솜므전투

한편 베르덩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베르덩 으로부터 125마일 떨어진 솜므강 유역에서는 영국군의 주도로 대규모의 공세가 준비되게 됩니다.
이는 베르덩에서의 독일군의 압박을 줄이고 서부전선에서의 전국을 유리하게 이끌어나가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하지만 공격 시작 전 엄청난 규모의 대규모 포격에도 불구하고 영국군은 공격 첫날 반나절동안에만 6만에 이르는 사상자를 기록할 정도로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되고 몇 달 동안 계속해서 공세를 취하게 되지만 결국 실패하게 됩니다.

파스샹달 전투

1917년 독일측의 무제한잠수함 작전으로 많은 피해를 입고 있던 영국은 북해에 면한 독일의 잠수함 기지들을 점령하기 위해 벨기에의 이프르 근처에서 공세를 취하게 됩니다.
하지만 습지대로 이루어진 지형과 우기가 겹치면서 영국군은 참호가 물에 잠기는 등의 최악의 조건에서 전투를 벌여야 했고 결국 작전은 실패하게 됩니다.
유명한 트렌치코트는 이 전투에서 비를 막기 위해 병사들이 입었던 우비에서 유래하게 됩니다.

전쟁의 마지막 공세

1918년 독일은 미군이 도착하기 전에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5차례에 걸처 대규모의 공세를 서부전선 전역에서 감행합니다.
당 시 이 작전을 입안한 독일군 참모총장 루덴도르프의 이름을 따 루덴도르프 대공세라 불리는 이 전투들은 초반 성공하는 듯 했지만 연합군측의 효과적인 방어와 독일군의 물자부족 등으로 실패하게 되며 독일군은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게 됩니다.
이후 미군의 도착으로 오히려 전력이 강화된 연합군은 안정적으로 공세를 벌여 독일군은 위기에 빠지게 되고 결국 11월 11일 연합국에 항복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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